라디오헤드가 진짜 온다고지난 겨울, 폭설이 내리던 밤. 파주출판단지의 한 식당에서 제육덮밥을 우겨넣으며 소복이 눈이 쌓이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걸려온 전화. 다급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외쳤습니다.
"라디오헤드가 온대!"
"……"
"진짜임."
"헐, 그랬음 좋겠다. 톰 요크가 초딩 때 한국 애한테 얻어맞았대. 그래서 안 와."
뉴스를 검색해보니, 검색어 순위에 라디오헤드 내한 소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설마. 각종 블로그와 카페에는 라디오헤드와 함께 청춘을 다 보냈던 시절을 회고하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창밖엔 여전히 침묵 속에 폭설이 내리고 있었고, 멀리서 기억 속에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습니다.
"그 책 안 돼. 인마. 라디오헤드가 한국에 오면 몰라도……."
사실 아마존에서 <라디오헤드로 철학하기>를 찾아낸 건 꽤 시간이 지난 일입니다. 그러나 해외 아티스트에 관한 책을 섣불리 내놓는다는 건 출판사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래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라디오헤드의 보컬이 어렸을 때 한국 친구한테 얻어맞았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내한은 불가능해 보였으니 이렇게 빨리(?) 라디오헤드가 국내 최대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당당히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한 일입니다.
문제는 시간이었습니다. 내한 공연 전에 책이 나와서 독자 여러분들이 책을 읽고 공연에 가셔야 할 텐데. 일정을 잡으면서도 조마조마 했습니다. 가능할까?
먼저 에이전시에 급행으로 진행해야 할 계약 건임을 누차 알렸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책은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요청이 들어온 상태였습니다. 동시에 번역자와 디자이너를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번역자로는 철학과 출신에 라디오헤드의 광팬이자 "21세기 문단의 총아"라는 평가를 받는 김경주 시인이 흔쾌히 응했고, 이전에 김경주 시인의 책을 작업하면서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던 아이비리그 출신의 디자이너 또한 역시 라디오헤드의 팬이라며 바로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원출판사로부터 계약서가 도착했습니다.
인쇄 사고인가 과감한 디자인인가지산록페스티벌을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라디오헤드에게 책이 덜 나왔으니 8월쯤에 오세요,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답은 그냥 편집자도, 번역자도, 디자이너도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겠지요. (덕분에 제 사수님이신 K과장님도 야근행렬에 동참을 ㅠㅠ) 아무튼 그동안 "붕붕드링크" 대탐험을 했고, 레드불, 솔라, 야, 핫식스, 번, 박카스+포카리 중에 저에게는 "야"가 맞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번역을 진행하면서 낮에는 수시로 택시를 타고 디자인실로 건너가 회의를 하고 담배연기로 디자인실을 가득 채운 뒤 다시 택시를 타고 와서 밤을 새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회의를 거듭한 결과 이 책의 편집개발요소로 "이미지주석"이라는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라디오헤드를 좋아하는 독자 그리고 음악과 문화 철학 전반에 관심 있는 독자 모두를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고 어느 한 쪽에만 속해 있는 (가령 라디오헤드만 좋아하거나 혹은 철학에만 관심 있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미지를 곁들인 주석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디자인 또한 이 시대 젊은 예술가들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고 있는 라디오헤드인 만큼 좀 더 과감하고 감각적인 방향으로 잡게 되었습니다.
편집과 디자인의 사이의 충돌도 있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장 번호가 끝으로 갈수록 움직이는 콘셉트였는데 14번과 15번이 하시라(쪽표제, 매 쪽마다 붙은 책 제목과 장 제목)를 그대로 지나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텍스트가 겹쳐버린다니! 편집자의 입장에서는 분명 인쇄 사고처럼 보일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아래 사진처럼 하시라의 위치를 약간 위로 올려 겹치지 않는 걸로 수정을 했지만, 글쎄요. 그처럼 번호가 하시라 위를 그대로 지나가버리는 어떤 "광포성"을 중요한 디자인 요소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단행본에서 그러한 파격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나 하는 고민거리를 안겨주었습니다.
표지와 제목은 마지막까지 우리 모두를 괴롭혔습니다. 표지에 톰 요크의 얼굴 위로 내려앉은 그림자는 철학자 메를로 퐁티의 초록 영혼입니다. 톰 요크에게 빙의한 모습이죠. 원래는 검은색의 딱 죽고 싶은 우울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안들이 더 나오게 됩니다. 일러스트를 이용한 시안들과 다시 원래의 시안을 저울질한 끝에 원래의 시안을 선택하게 되었고, 디자이너는 퐁티의 영혼을 "좀 가볍게 우울한" 초록 영혼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한빛비즈의 로고 색깔로 이루어진 표지가 완성되었습니다.
원래 목표 하판일이었던 7월 6일을 훌쩍 넘겨 20일에야 편집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죄송하게도 제작 담당 과장님께서 주말 끼고 3일 만에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엄청난 쪼임을 당하셨습니다.(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책이 나오자마자 신문사로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덧. 지산록페스티벌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드디어 라디오헤드가 옵니다. (그리고 저는 책 싸들고 갑니다.)
톰 요크 얼굴이 면봉만 하게 보여요사무실에서 책을 싸들고 출발했습니다. "늦어도 3시엔 도착하겠지." 그럼 제임스 이하도 보고 맥주 빨리 마시기 대회에 다시 나가서 재작년의 설움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덕평IC를 나가려는 차량 행렬이 도대체 끝이 보이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IC에서 록페스티벌 현장까지 10분이면 갈 거리를 무려 1시간 반이나 기어서 갔고, 도착했을 땐 이미 메인무대 앞쪽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엘비스 코스텔로의 할아버지의 작살나는 록앤롤 무대를 뒤로 한 채 저는 카트에 책 120부를 싣고 고행을 시작합니다. 아, 이 분들에게 이 책을 알려야 하는데, 이 분들 엘비스 코스텔로 앞에서 신나게 노시고 계시지만 다 라디오헤드 보러 오신 분들일 텐데…….
걱정을 하며 맥주를 들이붓는 사이 밤이 찾아왔습니다. 멀리서 환호성이 들려옵니다. 하늘이 거의 짙은 보랏빛으로 바뀌고 잔디밭에서 올라온 습기에 정신이 몽롱해질 때 (결코 맥주 때문이 아니라) 라디오헤드의
가 시작되었습니다. 저 멀리서 톰 요크의 얼굴이 면봉만 하게 보였습니다.
공연은 대부분은 최근 앨범의 곡들로 채워졌습니다. 유튜브에서 남의 나라에서 한 공연 영상 보면서 밤을 새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도대체 이게 현실인지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역시 이번 공연에서도 라디오헤드는 전자음악을 적극 수용해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을 쓰윽 베고 지나가는 듯한 날카로운 서정성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전위와 대중음악 사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면서 딱 반 발짝 앞서 사람들을 끌어 모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것이 마치 그로테스크한 풍경 속의 "피리 부는 소년"같다고 할까요? 그날 공연은 아마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평생 잊지 못할 공연 중에 하나로 남을 정도로 신비롭고 전율적인 무대로 남을 것입니다.
라디오헤드가 다녀간 뒤 언론에서 앞 다퉈 공연 소식을 전하면서 가장 놀라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라디오헤드의 친환경적인 태도였습니다. 이 책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톰 요크는 실제로 "이상 기후 현상으로 인한 불안 때문에 새벽 4시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잠에서 깨어난다."고 하죠. 그는 실제로 여러 환경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솔로 앨범 『The Eraser』를 환경 문제에 대한 이슈들로 가득 채우기도 했습니다. 역시 진정 좋은 음악은 삶에 대한 태도와 철학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다른 뮤지션은 몰라도 라디오헤드만은, 라디오헤드의 음악과 메시지 그리고 그들의 행보는 한 권의 묵직한 책으로 엮어내도 괜찮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