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광장 귀퉁이에 한 시각장애인이 앉아서 구걸을 한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대로 자신의 사연을 적은 두꺼운 종이 옆에는 동전을 넣는 깡통이 놓여 있다. 그 앞을 바삐 지나가는 사람 중 몇이 깡통에 동전을 넣는다. 넓은 광장, 눈을 감은 장애인, 끊임없이 흘러가는 인파의 구둣발 소리, 가끔 그 흐름을 깨는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도시의 일상을 연출하고 있다.
잠시 후 익숙한 풍경을 깨는 일이 일어난다. 느린 발걸음 소리가 천천히 시각장애인 앞에 멈춰 선다. 그 발길의 주인공은 장애인을 지나치지 않고 앞에서서 한참 동안 종이 뒤편에다 새로운 문장을 적는다. 장애인은 손을 뻗어 그 사람의 구두를 만져본다. 여자의 날렵한 하이힐이다. 여자는 떠나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깡통에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쉬지않고 이어진다. 얼마 후 다시 그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시각장애인은 그녀가 또 왔음을 알아차린다. “당신, 이 종이에 뭐라고 쓴 거죠?” 여자가 종이를 들자 화면에는 그가 쓴 글이 보인다.
‘저는 앞을 볼 수 없어요. 도와주세요.’
“저는 같은 말을 좀 다르게 썼을 뿐이에요.” 그 종이 뒤편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날이 아주 좋아요. 전 볼 수가 없지만요.’
인터넷을 보다가 발견한 이 짧은 동영상의 제목은 ‘Change the words, Change the world’였다. 언어가 세상을 바꾼다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 글쓰기 강의를 할 때 종종 인용하곤 한다. 어떤 장황한 설명보다 언어가 가진 힘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다.
공감을 끌어내는 언어의 힘
나와 남과의 거리는 한 뼘도 멀다. 김춘수 시인의 말대로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꽃도 꽃이 아니다. 의미를 두지 않은 타인은 사물과도 같다. 손을 내밀거나 말을 걸어서 그 거리를 좁혔을 때 관계가 생기고 내 삶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언어, 말이나 글이다.
인생에서 사실fact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까? 시각장애인이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현실에는 한치의 거짓도 없다. 그 사실이 타인에게 건너가는 데는 다른 도움이 필요하다. 공감이 작용해야만 한다. 하지만 비장애인은 시각장애인이 감당해야 할 고통의 실체를 모른다.
우리는 앞을 볼 수 없는 장애인이 햇살 가득한 광장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알 수가 없다. 아무런 관계도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 시각장애가 있다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상실을 뜻한다고 말해주자 비로소 그 고통에 공감한다. 변화는 거기서 일어난다.
혹시 주변에 있는 중요한 누군가와 갈등을 겪고 있다면, 그 갈등이 고통의 원인이라면 이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 사람이 알 수 있는 언어로 말하고 있나?’ ‘그 사람이 듣고 싶은 말, 꼭 알아야 할 말을 제대로 했나?’ ‘나는 팩트만을 나열해놓고 할 말을 다 했다며 모든 걸 그 사람 탓으로 돌리고 있는 건 아닐까?’
글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반응을 얻지 못했다면 상황을 상대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냈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상대의 가슴 한가운데를 푹 찌르는 말을 빚어내는 것은 내 마음속 진심이다. 진심은 상대에게 전해져 공명을 일으킨다.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글)인가?
‘Change the words, Change the world’를 떠올리며 당신의 언어를 바꿀 수만 있다면 언젠가 당신의 세계(인생)가 바뀔 것이다. 일상에서 수시로 스쳐 지나가는 바를 한 장면으로 압축해서 보여주자. 큰 변화의 씨앗은 언제나 작은 움직임에 있다.
시간이 우리를 현명한 사람으로 만들어줄까?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삶 앞에서 어리둥절할 때가 많다. 원인을 찾고자 인문학 아카데미나 각종 동호회에 가입한다. 공부는 학생만 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늘 독서와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사람 인人’과 ‘글월 문文’으로 이루어진 인문학에서 그 답을 찾는다.
사람은 어쨌든 글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존재인 것이다. 글이란 평면적인 한 인간의 삶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해주는 힘이 있다. 요즘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한 글자라도 끄적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녹록한 일은 아니다. 대부분은 무엇을 써야할지 모르겠다거나, 노트북을 켜고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으면 머릿속이 텅 빈 듯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글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유전자에 글을 쓰는 능력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뇌과학 연구자들의 주장이다. 말은 자연스럽게 배우지만 글은 다르다. 생각을 정리하고 문법에 맞게 문장을 만드는 과정은 훈련이 필요하다. 정규 교과과정을 충실히 거쳐 성인이 되었다고 해도 글쓰기 훈련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글쓰기 범위를 정하고 생각을 시작하자
글쓰기 강의를 할 때면 제일 먼저 글쓰기 범위를 정해준다. ‘내 인생 최악의 여행’ ‘나는 왜 자꾸 화가 날까?’ ‘3년 후의 내모습’ ‘가장 친한 친구’ 등 삶에 밀착된 주제를 써볼 것을 권한다. 주제는 달라도 내용은 자기 인생의 어느 날들에 관한 이야기다. 글의 배경에는 언제나 내가 있고 내가 살아온 인생이 있다. 글 속에서 깜빡 잊고 살았던 자기의 본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내가 그때 그토록 마음 아팠구나.’ ‘그날 나는 정말 행복했어.’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도 그 일로 무척 화가 났겠군.'
글을 쓰는 동안 자기 인생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그 상황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의 처지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글이 되는 순간 객관적인 거리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읽기에서 머물지 않고 쓰기로 나아가고자 한다. 남의 글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만의 글을 쓰고 싶어 한다. 나의 인생은 남의 인생과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는 이유는 해답을 찾기 위한 모색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출발점 삼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매일 30분 이상 쓰자
글쓰기에 비법이 있다면 매일 꾸준히 쓰는 것뿐이다. 책상에 앉아 머릿속에서 실을 잣듯이 글을 뽑아내려는 행동 자체가 중요하다. 해보면 알겠지만 글쓰기를 생활화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인생을 몸으로 한 번 살고, 글로 다시 한 번 복습, 점검한다.
둘째,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을 관찰하자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가까이 때론 멀리서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을 다시 살펴보자. 무엇이든 자세히 보면 달리 보인다. 이게 원래 그런 거였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생활의 재발견이다. 맘만 먹으면 내가 찾는 많은 힌트와 단서들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다.
셋째,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자
앞서 얘기한 두 가지는 남은 인생을 큰 틀에서 짜기 위한 디딤돌이다. 디딤돌 위에 이정표를 세워야 한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남은 인생 동안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목표가 생기고 실천 동기가 부여된다. 실천에 앞서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질문에서 그치지 말고 답을 찾으려 노력하자. 쉼 없는 질문과 모색, 해답.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뼈와 살이다.
일단은 시작해서 무조건 써나가야 한다. 글쓰기는 손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자연스러우며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잘하면 조력자, 적어도 동병상련의 벗 노릇을 자처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느리더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핵심이다.
“Slow and Steady!”
인생은 스토리텔링이다. 쓸 것은 무궁무진하다. 아직 눈과 귀가 밝지 않아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알지 못할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텍스트는 나 자신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글쓰기는 곧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을것이다. 이제 첫걸음을 내디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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